◎ 부마민주항쟁 기념일: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기리다
[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2024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정부 주관 공식기념행사가 열립니다. 부산시와 경남도, 지역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이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2019년 10월 부산시에서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범국민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추진위는 100만명 서명운동 등을 통해 국가기념일 지정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 부마민주항쟁의 이유
● 정치적 요인
-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과 민주화 요구
- 김영삼 의원의 총재직 정지와 의원직 박탈에 대한 반발
- 언론탄압과 정치적 자유 제한에 대한 불만
● 경제적 요인
- 1970년대 후반 오일쇼크로 인한 물가상승과 경기침체
- 부산지역의 경공업 중심 산업구조로 인한 상대적 낙후
-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서 소외되면서 부산지역 경제가 침체
- 계층 간 경제적 격차 심화와 서민들의 생활고
● 노동 문제
- YH무역 노동자 농성 사태 등 노동 현안에 대한 불만
- 어용노조에 반발하는 민주노조 결성 움직임과 정부 충돌
- 따라서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정치적 반발, 경제적 어려움과 지역 격차, 노동 문제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습니다.
◎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대가 외쳤던 주요 구호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대가 외쳤던 주요 구호 중 "유신철폐"가 가장 대표적이었습니다.
"유신철폐"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철폐를 요구하는 구호였습니다.
시위 초기부터 “유신철폐” 구호가 주를 이루었고, 시위가 확산되면서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유신철폐” 외에도 “독재타도”, “언론자유”, “정치탄압 중단”, “유신 정권 타도” 등의 구호도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과 민주화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경제적 요구사항으로 “부가가치세 철폐” 구호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신철폐"는 부마민주항쟁의 상징이 되는 가장 중요한 구호였으며, 박정희 유신체제 종식을 위한 민주화 열망을 대변했습니다.
◎ 부마민주항쟁의 경제적 배경
● 부산지역의 경제적 침체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으로 인해 부산지역 경제가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습니다.
부산은 경공업 중심지로 중화학공업 투자에서 소외되면서 지역 경제가 침체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부산지역 노동자들의 실업과 임금 삭감 등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습니다.
● 물가상승과 생활고
1970년대 후반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인한 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서민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 부유층과 서민층 간 격차 심화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으로 특정 재벌과 부유층은 부를 축적한 반면 서민층은 상대적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계층 간 경제적 격차가 부마민주항쟁의 또 다른 경제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산·마산 지역의 경제적 낙후, 물가상승과 생활고, 계층 간 격차 등이 부마민주항쟁의 주요 경제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 부마민주항쟁의 주요 사건
● 부산 시위 확산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학생시위에서 시작되어 시민들이 합세하며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었습니다.
17일까지 부산 시내 곳곳에서 5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대는 파출소, 신문사, 방송국, 경찰차량 등에 돌을 던지고 방화하는 등 폭력시위가 이어졌습니다.
● 마산 시위 확대
18일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시위가 마산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마산 시내 상권과 공장지대에서 노동자와 상인들이 가세하며 규모가 커졌습니다. 마산시위에서는 세무서 공격, 부유층 주택 방화 등 경제적 요구사항도 제기되었습니다.
계엄군 진압과 유혈사태 정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를 진압하려 했습니다. 계엄군의 발포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시위는 더욱 과격해지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불신과 반발이 높아졌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해 발생한 대규모 민주화운동으로,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권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 부마민주항쟁의 주요 인물
부마민주항쟁은 학생과 시민들이 주도한 자발적인 대중운동이었기 때문에 특정 지도자나 주요 인물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항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김수환 추기경: 부마민주항쟁 당시 가톨릭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유린 실태를 국제사회에 알리며 정권 퇴진을 촉구했다.
● 문익환 목사: 부마민주항쟁 당시 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이었다.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 이민우: 부산대 총학생회장으로 부마민주항쟁의 주도 세력이었던 부산대 시위를 이끌었다.
● 김근식: 경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마산지역 시위를 주도했다.
● 김지하 시인: 부마민주항쟁 당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고, 유신체제 반대 시위에 참여해 구속되기도 했다.이들은 부마민주항쟁 과정에서 시위를 주도하거나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특정 지도자 없이 학생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대중운동이었습니다.
◎ 향후 과제
부마민주항쟁 관련 희생자들에 대한 진상규명, 명예회복, 보상이 필요합니다.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연장과 권한 확대를 위한 법 개정이 요구됩니다.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재평가와 진상규명,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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