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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날, 기념일, 공휴일, 비공휴일

11월 3일 학생독립 운동 기념일

by 그날 이야기 2024.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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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 기념일은 1929년 11월 3일에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독립운동으로,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배경

1920년대 후반, 일제의 민족차별과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학생들의 반발이 고조되었습니다. 특히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 사건을 계기로 광주 지역 학생들의 반일 의식이 높아졌습니다.

◎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전개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와 수피아여고 등 광주 지역 학생들이 주도하여 항일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서울, 평양 등 전국 350여 개 학교에서 동참하며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습니다. 신간회, 청년단체 등이 학생운동을 지원하며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학생들을 구금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강경 진압에 나섰습니다.

◎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지정 경과

이 운동은 1953년 '학생의 날’로 정부기념일이 되었다가 1973년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1984년에 다시 부활하였고, 2006년에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요 인물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의 박준채, 왕재일, 장재성, 광주농업학교(현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의 정동수, 정남균, 정종석, 김한필, 문승수, 박인생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현 광주교육대학교)의 허정숙과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자고등학교)의 신경애가 여학생 대표로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 광주학생항일운동 후 일본 정부의 대응

광주학생항일운동 이후 일본 정부는 강경 진압을 하였습니다. 일본 경찰은 소방대, 재향군인 등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시위에 가담한 학생 75명을 체포하고 구금하였습니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 관련 보도를 전면 통제하고 언론을 탄압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민족차별과 탄압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회유책을 내세워 학생들의 반발을 무마하려 했습니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내세워 동화 정책을 강조하였습니다.

 

 

◎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결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 확산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제는 학생들을 구금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강경 진압에 나섰습니다. 주모자로 지목된 박준채, 왕재일, 장재성 등이 구속되었습니다.

이로써 광주학생항일운동은 당시 민족차별과 식민지 교육에 반발한 학생들의 자발적 운동으로 시작되어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24.06.10 - [국가의 날, 기념일, 공휴일, 비공휴일] -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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